볼리비아가 강력한 엘니뇨 현상에 대응해 전 국토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로드리고 파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10월 31일(현지시간) 오후 엘니뇨 대응 칙령에 서명하며 비상사태를 공식화했다. 칙령은 내년까지 이어질 수 있는 가뭄, 홍수, 서리, 우박 피해를 비상사태 적용 범위에 넣었고, 구조팀의 추가 배치와 함께 중앙·지역 정부, 군, 경찰 간 협조 체계 구축을 골자로 한다. 평소의 예산 집행 절차를 거치지 않고서도 인력과 물자를 신속히 현장에 투입할 수 있도록 행정적 판을 미리 깔아놓은 셈이다.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된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의 모습 / 출처: Flickr(Dennis Jarvis) / 라이선스: FREE(CC 라이선스)

가뭄과 홍수, 동시에 몰아오는 이중의 위기

볼리비아 정부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엘니뇨가 촉발한 가뭄으로 국내 9개 주 가운데 6개 주에서 7만8천 가구가 피해를 입었다. 7만5천여 마리의 가축이 폐사했고, 넓은 면적의 농경지도 물을 잃은 것으로 집계됐다.

엘니뇨가 강하게 작동하면 남미에서는 대체로 태평양 연안국에는 집중호우가, 내륙 지역에는 긴 가뭄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산맥과 고원, 저지대, 아마존 우림이 한 나라 안에 공존하는 볼리비아의 지형 탓에 이런 변화는 더 복합적인 충격으로 돌아온다. 목초지가 말라 가축부터 희생됐고, 농작물 수확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문제는 가뭄만이 아니다. 우기 시작을 앞두고 정부는 국지성 폭우에 따른 홍수와 산사태, 급류성 홍수 가능성도 함께 경고했다. 같은 나라에서 물 부족과 물난리가 동시에 벌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난해 12월에는 산타크루즈 지역의 홍수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은 바 있다.

가뭄으로 수위가 크게 낮아진 저수지의 모습. 볼리비아는 가뭄만으로 7만8천 가구가 피해를 입었다(자료사진) / 출처: NARA·DVIDS Public Domain Archives / 라이선스: FREE(퍼블릭 도메인)

'슈퍼 엘니뇨'로 급선회…12월에 최대치 전망

엘니뇨는 적도 태평양의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비정상적으로 높아지며 전 세계의 바람과 강수 패턴을 흔드는 기후 현상으로, 대체로 2~7년 주기로 발생해 9~12개월간 이어진다. 이번 엘니뇨는 6월에 발생해 짧은 기간 사이 빠르게 강해졌다.

해수면 온도 상승폭이 2도를 넘어서면 '슈퍼 엘니뇨'로 분류되는데, 지난 7월 기준 주요 예측 모델 26개 가운데 23개가 연말까지 이 기준을 넘어설 것에 무게를 실었다. 세계기상기구(WMO)는 지난 9월 이번 엘니뇨가 2027년 2월까지 지속할 가능성이 거의 100%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세기는 12월 전후에 최대치를 찍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파장은 2027년 한 해 내내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슈퍼급으로 치닫는 만큼 세계 곳곳에서 이상기후 신호도 잇따르고 있다. 최근 한 달 사이에만 인도네시아의 산불, 대만을 향해 몰아친 강한 태풍, 인도의 몬순 부진에 따른 물과 전력 부족 등이 엘니뇨의 영향으로 해석되고 있다.

볼리비아만이 아니다…남미 전역이 비상

이웃나라들도 숨을 죽이고 있다. 페루에서는 기온 상승과 맞물린 산불로 지난달 한 달에만 최소 12명이 사망했다. 칠레 수도 산티아고는 지난 10월 강수량이 관측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고, 아르헨티나에서는 물에 잠긴 목장의 소떼를 배에 실어 옮기는 대책이 이어졌다.

남미 각국은 피해가 커진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 단위 비상사태를 잇달아 발령하고 있다. 국가 전체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재난 대응 자원을 미리 풀어놓은 사례로는 볼리비아가 대표적이다.

엘니뇨 시기 홍수로 유실된 교량의 항공 사진. 볼리비아 역시 우기 홍수와 산사태에 대비하고 있다(자료사진) / 출처: PICRYL(NARA 공개 기록) / 라이선스: FREE(퍼블릭 도메인)

과학계의 경고와 남은 과제

과학계의 시선은 더 멀리 가 있다. 이번 엘니뇨가 관측 사상 가장 강한 사례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고, 유엔 역시 '전례 없는' 규모라는 경고를 내놓았다. 일부 연구진은 이번 엘니뇨가 올해 6월부터 내년 2월까지 전 세계적으로 45만명 안팎의 초과 사망을 일으킬 수 있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피해는 기상 관측망과 복지 여건이 열악한 개발도상국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엘니뇨의 타격은 단기 재난으로 끝나지 않는다. 가뭄으로 파종 시기를 놓치면 다음 해 농산물 공급까지 흔들리고, 그 파장은 물가와 생계로까지 번질 수 있다. 가축과 농지 피해가 누적된 볼리비아 농촌의 회복 기간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이번 현상은 가뭄과 홍수 측면에서 매우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모든 기관의 협력이 필요하다."
— 로드리고 파스 볼리비아 대통령

이번 조치는 이미 일어난 피해를 수습하기보다 앞으로 닥칠 타격을 줄이자는 취지다. 관건은 12월 전후 최대치를 앞두고 물과 식량, 구조 인력, 의약품이 제때 현장에 도달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역 정부와 중앙 정부의 협조가 성과를 갈라놓는 만큼, 이번 조치가 형식에 그치지 않을지도 지켜볼 대목이다. 12월이 오기 전, 볼리비아의 대비가 충분했는지 여부는 곧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관측 사상 최강급이라는 전망 앞에서, 준비된 정도만큼 피해의 크기도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