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증설 경쟁이 반도체 패키지 기판과 인쇄회로기판(PCB) 생산능력을 빨아들이면서 내년 PC 생산 계획에 차질이 예고되고 있다. 닛케이아시아가 10월 27일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HP와 델 등 주요 PC 제조사들은 2027년 물량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각종 규격의 PCB 확보를 가장 심각한 공급망 병목으로 꼽았다. 반도체와 고대역폭메모리(HBM)에 이어 기판까지 'AI가 삼키는' 부품 목록에 이름을 올린 셈이다.

AI 가속기를 받치는 패키지 기판. AI 서버용 수요가 생산능력을 앞지르면서 PC·스마트폰용 범용 물량이 밀려나고 있다. /

2027년 라인업 앞두고 '기판 배정'부터 막혔다

PC 업계가 주목하는 부품은 CPU나 GPU가 아니라 완제품 안쪽에 들어가는 기판이다. 프로세서와 메모리, 각종 부품을 물리적으로 연결하는 판으로, 신호가 오가는 통로 역할을 한다. 닛케이아시아는 복수의 업계 관계자 인터뷰를 통해 PCB와 칩 기판이 내년 소비자 가전 생산의 핵심 제약 요인이 됐다고 전했다.

문제는 '얼마에 사느냐'가 아니라 '받을 수 있느냐'다. 한 글로벌 PC 제조사 고위 관계자는 내년 PC 출하량이 오히려 둔화할 수 있는데도 완제품에 넣을 필수 기판 물량을 배정받지 못해 발을 구르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통상 4분기에 다음 해 부품 계약을 마무리하는 관행을 감안하면, 지금 협상 테이블에서 밀린 업체는 내년 상반기 라인업에서 원천적으로 불리해진다.

생산을 마친 인쇄회로기판들. 범용 PCB 생산라인이 AI 서버용 고부가 제품으로 전환되면서 표준 규격 물량이 빠르게 줄고 있다. 

AI 칩 3사, 기판 라인부터 '선점'했다

근본 원인은 수요처의 쏠림이다. 엔비디아와 브로드컴, AMD 등 AI 프로세서 개발사들이 고부가 패키지 기판 생산능력을 사실상 장기 계약으로 묶어두고 있다. 엔비디아는 삼성전기와 일본 이비덴, 대만 유니마이크론 등과 손잡고 향후 3년간 기판 생산능력을 기존의 2.5배로 끌어올리는 공급망 구축에 나섰다. 브로드컴은 일본 톱판과 싱가포르에 합작법인을 세워 차세대 기판 전용 물량을 확보했다.

경영진이 직접 나서는 모습도 나온다. 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는 올해 아시아 주요 기판 제조사를 잇달아 찾아 긴급 물량 배정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과거 반도체 후공정의 주변부로 여겨지던 기판이 이제는 칩 설계 못지않게 공급망 협상의 주요 변수로 격상된 것이다.

구리 적층판(CCL)과 기판 패널이 쌓인 생산 현장. 소재와 설비까지 AI 서버 쪽으로 쏠리며 병목이 겹치고 있다. 
원자재가 더 급하다…CCL 12배, 유리섬유까지 AI로

증설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기판의 뼈대가 되는 동박적층판(CCL) 가격이 지난 7월 이후 12배 이상 치솟은 것으로 전해졌다. CCL은 구리박과 유리섬유 직물을 압착해 만드는데, 이 원자재마저 AI 서버용으로 옮겨가고 있다. 유리섬유 직물 제조사들이 저유전율·저손실(Low-Dk·Low-Df) 특수 소재로 설비를 전환하면서 일반 전자제품에 쓰이는 표준 유리섬유 공급이 사실상 끊겼다.

설비 납기도 발목을 잡는다. 대만 유니마이크론의 S.C. 치엔 회장은 기판 제조 장비 가운데 20%는 납기가 과거의 두 배 이상으로 늘었고, 일부 정밀 장비는 주문 후 인도까지 최대 30개월이 걸린다고 밝혔다. 납기를 앞당기기 위해 고객사는 물론 최종 고객사까지 장비 업체를 함께 찾아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세계 최대 CCL 업체인 대만 엘리트 머티리얼(EMC)의 동딩위 회장은 수주 가시성이 2030년까지 이어졌다며, 대만 신규 라인이 2028년에 가동돼야 생산능력이 세 배로 늘어난다고 밝혔다. 기판 제조사 킨웡의 영업 관계자는 신규 고객이 오늘 발주하면 가장 빠른 인도 시점이 2028년 말이라며 시장 과열을 전했다. 대만 디지타임스에 따르면 소재 부족은 2029년 이후까지 이어질 전망이며, 중국 킹보드 라미네이츠는 지난 10월 13일 올해 여덟 번째 가격 인상(15%)을 단행했다.

노트북 조립 라인. 부품 확보 실패는 곧 생산 일정 지연과 출하량 감소로 이어진다. 

한국은 '수혜'와 '원가 부담' 사이

국내 기판 업체들은 이 국면의 수혜자다. 삼성전기 패키지솔루션 사업부의 올 상반기 매출은 1조4,966억원으로 1년 전보다 41% 늘었고, 영업이익은 1,602억원으로 237% 급증했다. LG이노텍 패키지 사업도 같은 기간 매출 9,356억원, 영업이익 996억원으로 각각 18%, 94% 증가했다. 삼성전기와 LG이노텍의 반도체 기판 라인 가동률은 각각 89%, 94%로 사실상 풀가동 상태다.

"서버·데이터센터용 FC-BGA 수요가 생산 능력보다 50% 이상 많다." — 장덕현 삼성전기 대표(지난 3월)

증설 경쟁도 본격화됐다. 삼성전기는 2040년까지 25조원을 투입해 세종에 8조원 규모 AI 서버용 기판 라인을, 부산에 15조원 규모 생산·연구 거점을 구축하고 베트남 법인에도 12억달러를 추가 투자한다. LG이노텍은 구미에 6,000억원, 베트남 기판 증설에 1조원 이상을 배정했다. 소재 쪽에서는 두산이 역대 최대인 9,684억원을 CCL 증설에 투입하며 절반 이상을 중국에 배치했고, 대덕전자도 서버·네트워크용 기판 장기 공급 계약을 협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반대로 국내 세트 업체에는 원가 부담으로 돌아온다. 기판 업체들이 고마진 AI 제품으로 설비를 돌리면서 PC·스마트폰용 레거시 물량의 공급 여력이 줄고, 그만큼 단가 인상 압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한국 CCL 수출이 올 1~7월 42% 늘어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망…고비는 2027년 상반기

시장에서는 내년 상반기가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본다. UBS는 2027년 PC 판매가 다시 감소로 돌아설 것으로 전망을 바꿨는데, 부품난이 판매 자체를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엔비디아가 차세대 서버 플랫폼 '루빈 울트라'에 유리섬유를 뺀 PTFE·탄화수소(HC) 계열 기판 적용을 검토하는 것도 소재 병목을 우회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AI 서버용 PCB가 50층대까지 올라가면서 생산라인 하나가 감당하는 범용 물량은 계속 줄어드는 구조다. 기판 3사의 증설 속도와 CCL 가격 추이, 완제품 가격 전가 여부가 향후 1년의 관전 포인트다. AI 호황의 수혜가 부품 공급망을 거쳐 소비자가 체감하는 가격으로 어떻게 번질지가 이번 국면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