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정부가 향후 10년에 걸쳐 중앙정부 공무원 2만5,000명분의 일자리를 없애는 조직 개편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인공지능(AI) 도입과 규제 정비로 행정 생산성을 끌어올려 사람이 맡아온 업무량 자체를 줄이겠다는 구상이다. 주요국이 잇달아 공공부문 AI 활용을 선언해 왔지만, 감원 규모와 재정 절감액을 동시에 숫자로 못 박은 사례는 드물어 정책 실험의 성격을 띤다.
네덜란드 정부 청사의 대형 회의실. 정부는 관리·지원 조직과 회의·보고 체계를 줄이는 방식으로 인력을 감축하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10년간 2만5천 자리, 2035년 연 35억 유로 절감
에릭 판 더르 뷔르흐 왕국관계·효율정부 담당 국무장관은 10월 26일(현지시간) 하원에 보낸 서한에서 중앙정부 정규직 환산 기준 약 2만5,000개 일자리를 10년에 걸쳐 줄이겠다고 밝혔다. 2025년 말 기준 중앙정부 인력이 약 16만 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16%가량이 사라지는 셈이다. 로이터통신은 정부가 전체 정부 일자리의 약 20% 감축을 겨냥한다고 전했다.
재정 목표도 함께 제시됐다. 2027년 중앙정부에서 연 9억 유로를 절감하고, 2035년부터는 연 35억 유로를 아끼겠다는 구상이다. 항목별 절감 계획은 내년 봄 예산 메모에서 확정된다. 경찰과 국방은 감축 대상에서 제외됐다. 안보 수요가 커지는 분야는 인력을 그대로 두고, 정책·관리 기능에서 감축분을 메우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방식은 채용 동결이 아니다. 판 더르 뷔르흐 장관은 신규 채용을 일괄 중단하는 대신, 퇴직자가 나올 때마다 직무를 다시 따져 대체 채용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부처와 감독기관, 정책 집행기관별 목표 격차도 크다. 일부 보도는 특정 부처의 감축 폭이 45~60%에 이를 수 있다고 전했다.
AI는 수단, 목표는 조직의 체질 개선
감축 계획을 의회에 보고한 에릭 판 더르 뷔르흐 국무장관. 그는 일선 인력이 아닌 관리자와 자문관, 대변인, 비서 직군을 중심으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이번 계획에서 AI는 감축의 명분이자 실행 도구다. 정부는 2027년 1분기까지 AI를 활용해 공공부문 생산성을 높이는 세부 계획을 마련하기로 했다. 의회가 AI를 통한 정부 생산성 20% 향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여러 건 통과시킨 점도 배경으로 작용했다. 다만 이 결의안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권고 성격이다.
감축의 칼끝은 일선 현장 인력이 아니라 관리자와 자문관, 대변인, 비서 등 지원·관리 직군을 향한다. 정부는 각 부처 인력의 절반가량이 관리·지원·오버헤드 성격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이 비중을 35%까지 낮추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외부 인력 채용을 줄이는 방안도 함께 추진된다.
물리적 공간과 제도도 함께 줄인다. 직원 두 명당 책상 하나를 배정하고 남는 청사는 매각한다. 표준화되지 않은 정보기술(IT) 시스템은 통합한다. 매년 500건 이상의 규제를 폐지하거나 간소화하고, 상설 자문위원회 28개와 각종 자문위원회 150여 개도 정비 대상에 올렸다.
세 번의 약속, 세 번의 실패
이번 목표가 주목받는 이유는 이전 시도가 모두 목표에 미달했기 때문이다. 2018년 이후 네덜란드 중앙정부 일자리는 4만6,500개 늘어 40% 이상 증가했고, 2025년 말 16만 명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앞선 내각들도 공무원 감축을 공약했지만 인력은 오히려 불어났다.
정부 안팎에서는 목표 달성 여부를 두고 회의적인 시각이 나온다. 공무원 제도 개혁을 자문한 위원회는 디지털화와 AI가 효율을 높일 수는 있지만, 규제와 보조금, 각종 점검이 계속 늘어나는 구조를 함께 손보지 않으면 기술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전직 고위공무원 출신으로 이 분야의 대표적 전문가로 꼽히는 뤼얼 베커는 정책 과부하가 감축을 어렵게 만든다고 본다. 그는 정책 인력을 20~30%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감축 책임이 여러 부처에 흩어져 있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점을 문제로 꼽았다. 내무부도 연차보고서에서 국방 등 새로 맡는 과제가 늘어 목표 달성이 불확실하다고 인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알고리즘 행정의 그림자
AI 확대에는 신뢰 문제도 따라붙는다. 네덜란드는 2021년 아동수당 부정수급 적발에 동원된 알고리즘이 이중국적·저소득 가구를 부당하게 겨냥하면서 대규모 피해를 낳았고, 이 사태로 내각이 총사퇴했다. 행정 자동화가 속도를 낼수록 판단 근거를 설명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절차가 함께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우리가 해오던 방식을 계속할 수는 없다. 더 단순하고, 더 똑똑하고, 더 작은 정부를 위해 분명한 선택을 하겠다." — 에릭 판 더르 뷔르흐 국무장관, 의회 서한에서
관건은 '무엇을 줄였는가'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2027년 1분기 AI 활용안과 봄 예산안을 거치며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의회 논의에서 쟁점이 될 부분은 감축 총량이 아니라 감축의 질이다. 처리 건수와 대기시간, 민원 처리의 정확도 같은 지표를 함께 공개하지 않으면, 인력만 줄고 서비스 품질이 떨어지는 결과를 검증할 방법이 없다.
각국 정부가 AI를 내세워 조직 슬림화에 나서는 흐름 속에서, 네덜란드의 10년 실험은 공공부문 자동화가 실제로 일자리와 재정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보여주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목표치를 넘어선 인력 증가를 되돌릴 수 있을지, 그리고 줄어든 인력만큼 정부가 여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