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거즈에서 시작된 150년, 뉴클레인의 발견
핵산 연구의 출발점은 1869년이다. 스위스 출신 생화학자 프리드리히 미셰르는 화농이 묻은 환자 붕대에서 백혈구를 모아 세포 핵을 분리했고, 그 안에서 인을 다량 함유한 새로운 물질을 찾아냈다. 핵에서 나온 물질이라는 뜻으로 붙인 '뉴클레인'이라는 이름이 오늘날 핵산이라는 용어의 시초다.
이어 독일 생화학자 알브레히트 코셀이 핵산의 성분을 하나씩 뜯어냈다. 그는 아데닌·구아닌·시토신·티민·우라실 다섯 가지 염기를 분리해 핵산이 독자적인 화학적 구성 요소를 갖고 있음을 입증했다. 세포 핵의 화학을 밝힌 이 공로로 코셀은 191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생명의 정보가 어떤 '글자'로 적히는지가 처음 확인된 순간이었다.
핵산은 DNA와 RNA로 나뉘며 생명의 설계도 역할을 한다 / 출처: Easy-Peasy.AI이중나선 해독, 유전 정보는 어떻게 저장되고 복제되는가
핵산이 어떤 모습인지 밝혀지는 데는 다시 수십 년이 걸렸다.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촬영한 X선 회절 데이터를 바탕으로, DNA가 두 가닥이 서로 꼬인 이중나선 구조라는 모형을 제시했다. 마우리스 윌킨스의 실험 결과도 이 모형을 뒷받침했다. 이 구조 덕분에 유전 정보가 어떻게 저장되고, 세포 분열 때 어떻게 그대로 복제되는지가 설명됐다. 세 사람은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아데닌은 티민과, 구아닌은 시토신과 짝을 이루는 염기쌍 규칙이 이중나선의 핵심이다. 이 규칙 덕분에 한쪽 가닥만 있으면 나머지 절반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 유전이란 결국 핵산의 물리적 구조에서 나오는 현상이었던 것이다.
아데닌-티민, 구아닌-시토신이 짝을 이루는 DNA 염기쌍 다이어그램 / 출처: PICRYL(퍼블릭 도메인)RNA 세계의 세 가지 규칙, 간섭하고 복구하고 조절한다
연구의 무대는 이후 DNA에서 RNA로 옮겨갔다. 1998년 앤드류 파이어와 크레이그 멜로는 이중 가닥 RNA가 특정 유전자의 발현을 조용히 꺼버리는 'RNA 간섭(RNAi)' 현상을 발견했고, 이 성과는 2006년 노벨 생리의학상으로 이어졌다. 유전자의 '스위치'를 켜고 끄는 메커니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2015년 노벨 화학상은 DNA 복구 연구에 돌아갔다. 토마스 린달은 손상된 염기를 하나씩 잘라내 교체하는 염기절제복구 원리를, 폴 모드리치는 DNA 복제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를 바로잡는 정정 메커니즘을, 아지즈 산카르는 자외선으로 손상된 DNA를 복구하는 방식을 각각 규명했다. 세포가 하루에도 수많은 유전 정보 손상을 스스로 수선한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2024년에는 빅터 앰브로스와 게리 러브컨이 마이크로RNA 발견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예쁜꼬마선충 연구에서 아주 짧은 RNA 조각이 다른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크기가 작아 주목받지 못했던 RNA가 발달과 질병의 조율자 역할을 한다는 점이 인정받은 결과다.
핵산 연구는 지난 100년간 여러 차례 노벨상으로 이어졌다 / 출처: NARA·DVIDS 퍼블릭 도메인 아카이브(GetArchive)효과와 효능, 백신이 되고 약이 되고 진단 지표가 된다
핵산 연구가 쌓아온 원리는 의약품이라는 형태로 효능을 증명하고 있다. 202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카탈린 카리코와 드류 와이스먼은 뉴클레오사이드 염기를 변형해 만든 mRNA가 인체에서 지나친 염증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목표 단백질을 효율적으로 생산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노벨위원회는 이 발견을 수상 사유로 명시했다.
"효과적인 코로나19 메신저 리보핵산(mRNA) 백신 개발을 가능하게 한 뉴클레오사이드 염기 변형에 관한 발견" — 노벨위원회, 2023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사유
이 기술은 코로나19 백신 개발로 직접 이어졌다. 바이러스의 돌기 단백질 설계도를 mRNA로 전달해 면역 세포가 항체를 만들어내게 하는 방식으로, 수십 년간의 기초 연구가 팬데믹 상황에서 몇 달 만의 백신 개발을 가능하게 한 사례다. 이후 mRNA 기술은 암 백신 등으로 응용 범위를 넓히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RNA 간섭 원리 역시 치료제가 됐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2018년 세계 최초의 RNAi 치료제인 파티시란(제품명 온파트로)을 승인했다. 유전성 트랜스티레틴 아밀로이드증이라는 희귀 신경질환을 대상으로, 질병의 원인이 되는 비정상 단백질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유전자 발현을 조용히 묶어두는 방식이다. 유전자 침묵 기술이 실제 의약품으로 상용화된 첫 사례로 꼽힌다.
마이크로RNA는 진단의 단서로도 주목받고 있다. 암과 신경계 질환 등 다양한 질병에 마이크로RNA가 관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체내 마이크로RNA 패턴을 질병 탐지의 지표로 활용하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mRNA 백신은 핵산 연구가 실제 의약품으로 이어진 대표 사례다 / 출처: Unsplash다음 과제는 유전자 편집과 개인 맞춤 의학
핵산 연구의 다음 목표는 질병을 증상이 아닌 원인에서 다루는 것이다. 유전자 편집 기술과 개인별 유전체 정보를 반영한 맞춤 의학이 대표적인 과제로 꼽힌다. 핵산 연구에서 파생된 이런 시도들은 질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한다는 꿈을 현실적인 연구 목표로 바꿔놓았다.
미셰르가 붕대의 백혈구에서 인 함유 물질을 걸러내던 시절에는 핵산이 백신이나 치료제가 될 거라고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론 연구에서 시작된 150년의 축적이 실제 예방과 치료로 이어질 수 있었던 점은, 기초 과학 연구의 효능을 다시 확인해 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