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나 공습 같은 비상사태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문제는 그때 가방을 싸기 시작하면 늦는다는 점이다. 정부가 안내하는 '생존배낭'은 거창한 생존 장비 목록이 아니라, 대피소에서 며칠을 버티기 위한 최소한의 생활 도구 묶음이다. 무엇을, 얼마나 담아야 하는지 공식 기준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정부가 제시한 최소 기준은 '한 사람 2~3일'

행정안전부가 운영하는 국민안전24의 '비상시 국민행동요령'은 생존배낭을 "비상상황 발생 시 대피소 등에 대피 후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생활용품"으로 규정한다. 핵심 원칙은 단순하다. 각자 들고 이동할 수 있는 분량, 즉 한 사람당 하나씩이다. 가족 전체의 짐을 한 사람이 지는 방식은 실제 대피 상황에서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비상사태란 전쟁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시 상황을 말합니다." — 행정안전부 '비상시 국민행동요령'

담아야 할 기본 품목은 2~3일분의 식수와 식량, 생필품, 상비약, 라디오, 손전등, 화생방 대비용품이다. 음식은 조리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간편식이 원칙이고, 유통기한을 주기적으로 확인해 교체해야 한다. 정부의 안내 방송을 들어야 하므로 라디오 건전지는 여분을 넉넉히 넣어두도록 안내한다.

대피용 비상키트는 한 사람이 직접 메고 이동할 수 있는 배낭 형태로 구성된다. 출처: Ready America

물과 식량은 '숫자'로 계산해야 한다

가장 흔한 실수가 물을 너무 적게 넣는 것이다. 미국 연방재난관리청(FEMA)은 1인당 하루 1갤런, 우리 단위로 약 3.8리터를 식수와 위생용으로 준비하라고 권고한다. 미국 적십자사는 대피용으로 3일분, 집에서 버티는 상황을 가정해 2주분을 함께 준비할 것을 권한다. 처방약도 최소 7일분을 별도로 챙기는 것이 기준이다.

수도가 끊기거나 오염이 의심될 때를 대비한 정수 정제. 물 무게를 줄이는 대신 정수 수단을 챙기는 방식이 실용적이다. 출처: Ready America

물은 무겁다. 3일분을 모두 들고 다니면 배낭 무게가 급격히 늘어 대피 속도가 떨어진다. 그래서 실무적으로는 휴대용 정수 필터나 정수 정제를 함께 넣고, 마실 물은 하루치 중심으로 줄이는 방법이 쓰인다. 식량은 밥·국처럼 조리가 필요한 품목보다 에너지바, 건빵, 통조림, 레토르트 식품처럼 개봉 즉시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채우는 편이 낫다.

화생방 대비용품, 방독면만으로는 부족하다

행정안전부는 공격 유형에 따라 대피 장소가 달라진다고 안내한다. 재래식 무기와 핵·방사능 공격 때는 민방위 대피소, 아파트 지하주차장, 지하철 역사로 피해야 하고, 화학 공격 때는 외부 공기를 차단할 수 있는 건물 높은 층의 실내가 기준이다. 같은 '대피'라도 방향이 정반대인 셈이다.

따라서 가방에는 방독면과 마스크, 젖은 수건처럼 호흡기를 가릴 수단이 필요하다. 여기에 비옷, 고무장갑, 긴 소매 옷을 더하면 피부 노출을 줄일 수 있다. 실내 밀폐용으로 비닐시트와 알루미늄테이프, 큰 쓰레기봉투도 넣어두면 쓸모가 크다. FEMA의 기본 비상용품 목록에도 비닐시트와 가위, 덕트테이프가 정식 항목으로 들어 있다.

전시 상황에서는 단순 상비약보다 출혈을 멈추는 외상 처치용품의 비중이 커진다. 출처: Amazon 제품 이미지

화학작용제에 노출됐다면 흐르는 물에 15분 이상 씻은 뒤 의료기관을 찾아야 하고, 오염된 옷은 밀폐 가능한 비닐봉투에 넣어 추가 오염을 막아야 한다. 생물학 공격이 의심될 때는 물을 끓여 마시고 음식은 15분 이상 조리하며, 수상한 우편물은 열지 말고 보건소나 질병관리청(1339)에 신고하는 것이 정부 안내다.

서류·현금·통신, 가장 자주 잊는 생존 도구

대피할 때 통장과 보험증서, 계약서, 신분증 같은 중요 서류를 함께 챙겨야 한다는 점도 국민행동요령에 명시돼 있다. 휴대전화만 믿기 어려운 상황도 대비해야 한다. 통신이 끊기면 가족과 만날 장소를 미리 정하고, 비상연락처를 적은 가족 비상연락카드를 만들어 배낭에 넣어두는 방식이 권고된다.

건전지가 떨어져도 돌려서 쓸 수 있는 수동 발전 라디오는 정부 안내 방송을 받는 핵심 수단이다. 출처: Camping World

카드 결제가 막힐 상황을 가정해 소액 현금을 넣어두는 것도 실용적이다. 스마트폰 보조배터리와 충전 케이블, 종이 지도, 호루라기, 수동식 통조림 따개 역시 각국 재난 당국이 공통으로 권하는 품목이다. 안경이나 보청기처럼 개인에게만 필요한 물품은 별도 목록으로 챙겨야 한다.

가족 구성원별로 한 가지씩 더 챙긴다

표준 목록만으로는 부족한 경우가 있다. 영유아가 있는 가정은 분유와 이유식, 젖병, 기저귀와 물티슈, 아기 담요, 체온계를 별도 파우치에 넣어야 한다. 분유를 타려면 물이 더 필요하므로 식수 계산에 조유용 물을 따로 더 잡아야 한다. 미국 적십자사도 영유아용 젖병·분유·기저귀를 기본 목록의 추가 품목으로 명시한다.

노약자는 약이 곧 생존 조건이다. 처방약을 최소 7일분 넣고, 약 이름과 용량, 복용 시간을 적은 복약 목록을 함께 보관해야 응급 상황에서 다른 의료진이 대응하기 쉽다. 안경과 보청기 여분 건전지, 보조기기, 신분증과 복지카드 사본도 같은 파우치에 모아두는 편이 좋다. 거동이 불편한 가족이 있다면 대피 동선을 계단 기준으로 미리 검증해 둬야 한다.

 

반려동물은 별도 배낭이 필요하다. 며칠분 사료와 물을 방수 용기에 담고, 목줄·하네스·입마개, 이동용 캐리어, 배변패드와 봉투, 예방접종 기록과 마이크로칩 정보를 챙긴다. FEMA는 반려동물과 함께 찍은 사진을 넣어두라고 권한다. 보호자와 헤어졌을 때 소유권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공공 대피소 상당수가 반려동물 반입을 제한하므로, 평소에 동반 가능한 시설과 대신 맡아줄 사람을 정해두는 것이 준비물보다 중요하다.

무게와 교체 주기가 완성도를 결정한다

구분 권장 품목 기준
식수 생수, 정수 정제·필터 1인 1일 3~3.8리터
식량 에너지바, 통조림, 레토르트 2~3일분
정보 수동 발전 라디오, 손전등 여분 건전지 포함
의약품 상비약, 처방약, 외상 처치용품 처방약 7일분
화생방 방독면·마스크, 비닐시트, 테이프 실내 밀폐용 포함
기타 현금, 서류 사본, 호루라기, 지도 방수 포장

배낭은 무거울수록 대피를 방해한다. 계단을 내려가 지하 대피소까지 이동해야 한다는 점을 기준으로 무게를 조절해야 한다. 식료품과 의약품은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에 교체하고, 1년에 한 번은 가족이 함께 내용물을 점검하는 것이 권고된다. 집뿐 아니라 직장과 차량에도 최소한의 비상용품을 나눠 두면 상황에 따라 대응 폭이 넓어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물건보다 동선이다. 집과 직장에서 가까운 민방위 대피소 위치를 미리 확인해 두고, 경계경보·공습경보·화생방경보·핵경보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익혀두어야 한다. 실제 상황에서는 정부의 안내 방송이 어떤 준비물 목록보다 우선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