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중국 다롄 낸드플래시 공장의 생산능력을 늘리기 위해 요청한 미국산 반도체 제조 장비의 수출 허가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문제는 이 허가가 단순한 공장 한 곳의 증설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SK하이닉스가 미국 뉴욕주에 추진 중인 대규모 낸드 공장 건설의 재원 조달 계획이 다롄 공장의 수익성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생산의 출발점인 실리콘 웨이퍼를 점검하는 연구원. 장비 반입 허가는 공장의 생산능력 자체를 좌우한다. / 출처: 미국 에너지부(로렌스리버모어국립연구소)

로이터 통신은 3일(현지시간) 사안에 정통한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SK하이닉스가 다롄 공장의 생산능력 확대에 필요한 장비 수출 허가를 신청했지만 미 상무부가 아직 승인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업계에서는 지난해 미국의 대중 장비 규제가 '개별 허가' 중심으로 재편된 이후 가장 직접적인 사례라는 평가가 나온다.

다롄의 문이 닫히자 뉴욕의 자금줄이 막혔다

두 사안이 연결된 구조는 단순하다. SK하이닉스는 다롄 공장의 생산성을 끌어올려 확보한 수익을 미국 현지 투자 재원으로 돌리는 구상을 세웠다. 그런데 증설용 장비가 들어오지 못하면 생산성 개선 자체가 미뤄지고, 결과적으로 뉴욕 공장에 투입할 현금흐름도 계획대로 나오기 어려워진다.

SK하이닉스의 미국 손자회사인 솔리다임은 뉴욕주 마시 지역에 낸드플래시 공장 두 곳을 짓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소식통에 따르면 투자 규모는 450억달러, 장기적으로는 1,000억달러까지 늘어날 수 있다. 원화로 환산하면 60조원대에서 최대 140조원에 이르는 사업이다. 회사 입장에서는 장비 허가 하나가 이 초대형 프로젝트의 속도를 결정하는 셈이다.

12인치 실리콘 웨이퍼. 메모리 공장의 생산능력은 웨이퍼 투입량과 직결된다. / 출처: Wikimedia Commons(Peellden) 

8월 말부터 열 차례 협상, 돌아온 답은 '불가'

협상은 이미 상당한 시간 진행됐다. 솔리다임 경영진은 지난 8월 말 이후 미 상무부 측과 열 차례 가까이 회의를 열며 설득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지난주 회의에서도 미국 측은 기존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생산능력 확대나 시설 개선을 목적으로 한 미국산 반도체 제조 장비의 추가 반입은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 미 상무부의 일관된 태도였다. — 로이터 통신이 전한 협상 내용 요지

미 상무부의 이 같은 기조는 중국의 첨단 기술 고도화를 막겠다는 국가안보 정책의 연장선에 있다. 문제는 이 원칙이 자국으로 유치하려는 외국인 투자와 정면으로 부딪힌다는 점이다. 미국은 반도체 생산시설을 자국 안으로 끌어들이는 정책을 병행하고 있는데, 그 투자 주체가 중국 공장을 운영하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진짜 분수령은 2027년 운영용 장비 허가

이번 사안에서 놓치기 쉬운 대목은 증설용 장비와 운영용 장비가 별개로 다뤄진다는 사실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양측은 2027년 다롄 공장 운영에 필요한 장비 수출 허가를 두고는 별도로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 증설은 막혔지만 기존 라인을 굴리는 데 필요한 장비는 협상 여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다만 운영용 허가 역시 매년 갱신해야 하는 구조다. 미국은 지난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에 부여했던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지위를 철회하고, 대신 연간 단위로 장비 반입을 승인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바꿨다. 한 해 허가를 받아도 다음 해에 다시 문을 두드려야 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매년 초 불확실성을 떠안는 셈이다.

낸드플래시 칩의 평면 모습. 다롄 공장은 이 낸드 제품을 생산해 미국 투자 재원을 만드는 구도였다. / 출처: Wikimedia Commons(2x910)

업계가 주목하는 다롄 공장의 숫자

다롄 공장은 SK하이닉스가 인수한 솔리다임의 핵심 낸드 생산기지다. 업계 보도에 따르면 1공장은 월 10만장 안팎의 웨이퍼를 처리하고, 2공장이 본격 가동되면 현지 생산능력이 최대 50%가량 늘어날 수 있다. 현재 192단 제품을 생산하는 라인을 240단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방안도 검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증설은 중국 현지 업체들의 추격을 견제하려는 목적과 맞닿아 있다. 다만 첨단 공정 전환에 필요한 장비 대부분이 미국산이어서, 허가 없이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어렵다. 공장을 세워도 장비가 들어오지 못하면 라인은 설비만 갖춘 채 멈춰 있게 된다.

전시장에 공개된 SK하이닉스 메모리 제품. 규제 변수는 D램과 낸드 전반의 투자 일정에 영향을 준다. / 출처: Wikimedia Commons(4300streetcar) 

규제와 유치 사이, 정책 딜레마

외신들은 이번 사안을 미국 정책의 구조적 딜레마로 읽는다. 중국 견제라는 안보 목표를 강하게 유지할수록, 중국에 생산기지를 둔 기업의 미국 투자 유인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반대로 투자 유치를 위해 예외를 넓히면 규제의 실효성이 흐려진다. 어느 쪽을 택해도 비용이 발생하는 셈이다.

삼성전자도 같은 제도의 영향을 받는 위치에 있다. 미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에 대해 연간 허가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전환했고, 두 회사 모두 매년 반입 계획을 제출해야 한다. 국내 기업의 중국 공장 운영이 '예외'가 아니라 '연례 심사'의 대상이 됐다는 점이 이번 사안의 본질이다.

남는 숙제

SK하이닉스는 다롄 증설이 무리한 확장이 아니라 승인 절차를 밟는 정상적인 설비 보완이라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허가가 언제 나올지는 회사가 통제할 수 있는 변수가 아니다. 2027년 운영용 장비 협상 결과와 미국의 대중 정책 기조 변화가 향후 투자 일정을 가를 전망이다.

국내에서는 장비·소재 협력사들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증설 일정이 밀리면 장비 발주와 부품 공급 계획도 함께 늦춰지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허가 문제는 개별 기업의 노력만으로 풀기 어려운 만큼 정부 간 협의 채널이 계속 작동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결국 이번 사안은 메모리 한 회사의 공장 증설이 아니라, 안보 규제와 산업 투자가 충돌하는 지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다롄의 장비 한 대가 뉴욕의 공장 두 기를 결정하는 구조, 그 연결고리가 앞으로도 반도체 투자 판도를 흔들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