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이 남쪽으로 기울어 내려 물을 내주는 곳이 있다. 전북 진안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장장 225킬로미터를 흘러 옥정호, 순창, 곡성, 구례를 지나 경남 하동에서 광양만으로 빠져나간다. 이 강변의 고장은 봄 벚꽃길로 이름을 알렸지만, 사실 가장 화려한 계절은 가을이라는 말이 지역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강 위에 깔리는 물안개, 지리산과 백운산에서 넘어오는 단풍, 강변 들판을 은빛으로 물들이는 억새가 그 근거다. 올가을 단풍 여행지를 고민하고 있다면, 유명 단풍 산악지대 대신 한 번쯤 하동을 살펴볼 만하다.

가을 섬진강변을 따라 물든 단풍과 둔치길 풍경
물안개 걷힌 뒤 펼쳐지는 섬진강변 단풍

 

섬진강의 가을은 아침저녁 물안개에서 시작된다. 서늘한 공기가 강물 위에 하얗게 앉으면 지리산과 백운산의 단풍이 그 위로 드리워지고, 강변 둔치의 억새는 흰 이삭을 흔들며 들판을 밀어낸다. 강을 따라 조성된 도로와 둔치길을 따라 걷거나 달리면 어느 구간이든 강과 산이 함께 화면에 들어온다.

이 강은 옛부터 동서를 잇는 물길이기도 했다. 하동 화개장터가 섬진강과 지리산 계곡물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한 것도 그 덕분이다. 남해에서 섬진강을 따라 올라온 짐배가 하역하던 곳이 장으로 발달했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물자와 사람이 이곳에서 어우러졌다. 장터를 걸으면서 강변 풍경을 함께 보는 것도 하동 가을 여행의 기본 코스다.

천년 고찰 쌍계사, 국보 탑비와 단풍 그리고 불일폭포

가을 하동의 심장부는 지리산 자락의 쌍계사다. 신라에 창건된 천 년 묵은 절로, 절에 있는 진감선사탑비는 국보 제47호로 지정된 신라 탑비의 걸작으로 꼽힌다. 팔상전에는 부처의 생애 여덟 장면을 그린 팔상도가 모셔져 있어 불교 미술의 결정을 볼 수 있다.

찻잎의 고장답게 쌍계사는 우리나라 차 문화의 시배지로도 알려져 있다. 절 입구에서 본당까지 이어지는 숲길은 계곡물 소리와 함께 걷기 좋게 정돈돼 있고, 가을 단풍철에는 사진작가들이 먼저 찾는 장소로 소문난다. 산행에 자신이 있다면 절에서 이어지는 불일폭포 트레킹을 고려할 만하다. 지리산 10경의 하나인 불일폭포는 낙차 60미터의 물줄기로, 단풍 숲과 어우러진 모습이 가을에 가장 빛난다.

 

돌탑 1,500여 개가 병풍인 삼성궁과 회남재 숲길

지리산 청학동 깊은 곳의 삼성궁은 하동에서 가장 색다른 풍경을 만드는 곳이다.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성전으로, 한풀선사가 1983년부터 30여 년에 걸쳐 홀로 돌을 쌓아 일군 공간이다. 크고 작은 돌탑 1,500여 개가 숲과 연못, 계곡 사이에 어우러져 걷는 길마다 화면이 그림처럼 정리된다. 초겨울을 제외한 가을에는 단풍이 돌탑 뒤편을 함께 물들이며 분위기를 한층 높인다.

삼성궁에서 회남재로 이어지는 숲길은 초보 트레커와 가족 단위 나들이에 알맞은 코스로 평가된다. 고도 차이가 거의 없는 평지길이어서 편한 복장으로도 무리가 없고, 삼성궁 주차장 기준 왕복 11.6킬로미터이다. 나무 사이로 지리산 능선이 보이는 구간을 지나면 가을빛이 짙어진 숲이 이어진다.

가을 단풍과 함께 병풍을 이루는 하동 삼성궁의 돌탑
'토지'의 들판 평사리와 수백 년 노송의 송림공원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는 하동 가을의 정취를 읽게 하는 또 하나의 지점이다.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최참판댁은 소설의 고증을 바탕으로 지은 사랑채와 안채 등 14채의 한옥으로 구성돼 있고, 초가집과 돌담길이 어우러져 옛 시절의 마당 풍경을 온전히 재현한다.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소설 속 인물들이 살던 시간이 겹쳐 보인다.

강변으로 내려가면 하동 송림공원이 기다린다. 섬진강변을 따라 약 1킬로미터에 걸쳐 수령 300년이 넘는 노송이 줄지어 선 숲길로, 아름드리 소나무와 은빛 강변이 함께 어우러진 풍경이 인상적이다. 강한 피톤치드가 가득한 숲이라 단풍 구경에 지친 다리를 쉬어 가는 코스로 알맞다. 인근에서는 매년 10월께 북천 코스모스·메밀꽃축제도 열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금오산 케이블카와 스카이워크를 더하면 하루가 짧게 느껴진다.


코스모스와 메밀꽃이 만개하는 북천 축제 들판
방문 전 알아두면 좋은 정보
추천 여행지 섬진강변(화개장터 일대), 쌍계사, 삼성궁·회남재 숲길, 평사리·최참판댁, 하동 송림공원
트레킹 코스 회남재 숲길: 삼성궁 주차장 기준 왕복 11.6km, 고도차 거의 없는 평지
연계 코스 쌍계사-불일폭포 트레킹(불일폭포 낙차 60m, 지리산 10경)
주요 문화재 진감선사탑비(국보 제47호), 팔상전 팔상도
계절 이벤트 북천 코스모스·메밀꽃축제(매년 10월께 개최)
운영·요금·교통 시설별 운영 시간·입장 요금·주차 안내는 변동될 수 있으므로 하동군 공식 관광 정보에서 확인 필요

단풍 절정 시기는 해마다 달라지므로, 방문 전 하동군 공식 관광 정보로 단풍 진행 상황과 축제 일정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

아직 이름 덜 알려진 가을, 하동이 먼저다

가을 여행 철이면 단풍 명소로 불리는 곳곳에 사람이 몰린다. 그 와중에 하동은 봄 벚꽃의 인상이 강해 가을까지 이름을 올리지 못한 고장이다. 덕분에 섬진강변과 지리산 자락의 단풍은 상대적으로 한산하게 즐길 수 있다. 물안개, 억새, 단풍, 천 년 절, 1,500여 개의 돌탑, 그리고 '토지'의 들판까지 하나의 여정에 담긴다. 올가을 새로운 단풍 여행지를 찾는다면, 이름보다 풍경으로 말해주는 하동이 유력한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