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 북한 노동당 총무부장이 세계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 바이낸스의 대규모 해킹 사건과 관련해 미국 수사당국의 북한 연루 지목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담화를 냈다. 그는 해킹 주장을 '날조'라고 규정하고 미국의 조사를 겨냥해 '정치적 도발'이라고 비판한 것으로 전해졌다. 가상자산 업계 역사상 최대 규모로 기록되는 이번 사건이 국제 수사와 북미 간 공방전이라는 두 개의 국면으로 함께 번지고 있다는 점에서 후속 상황이 주목된다.
사상 최대 8조4000억원 피해…FBI, 북한 조직 소행으로 지목
사건은 10월 29일(현지시간) 발생했다. 세계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 바이낸스에서 약 63억 달러(약 8조4000억원) 상당의 가상자산이 해커들에게 탈취됐으며, 피해 규모는 2025년 2월 바이비트에서 발생한 15억 달러 해킹의 4배를 넘어선다. 당시 감지가 늦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이번 사건을 특징짓는다. 미 동부시간 오후 4시20분경 10억 달러 이상의 자금 유출이 처음 확인된 뒤 불과 20분 만에 유출액이 60억 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사건 발생 이틀 만인 10월 31일 이번 해킹이 북한 연계 해킹 조직 '트레이더트레이터'의 소행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이 조직은 바이비트 사건의 배후로도 지목된 바 있다. 블록체인 분석업체 TRM랩스와 체이널리시스 역시 북한 해킹 조직 라자루스 그룹의 관련성을 짚었으며, TRM랩스는 자신들의 판단에 대해 '높은 확신'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FBI는 탈취된 자산이 이더리움 등으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다며 관련 지갑 주소를 공개하고 가상자산 업계에 해당 주소와의 거래를 차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등과의 협력을 통해 지금까지 약 30억 달러가 동결된 것으로 파악되지만, 이는 피해액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블록체인과 사이버보안 개념도. 탈취 자금 추적은 블록체인 분석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 / 출처: theQnews김여정 "정치적 도발"…사실관계 정면 부인
김여정은 11월 2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전한 담화에서 FBI의 지목에 맞서 이번 해킹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북한 국영 통신사는 탈취 주장을 '날조'라고 지칭했고, 그 역시 미국의 수사 접근을 '정치적 도발'로 규정하며 '터무니없는 논리'라고 비판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여정은 이번 수사를 두고 "정치적 도발"이라고 규정하면서, 북한이 관련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조선중앙통신 담화, 11월 2일 종합).
북한 당국은 그간 가상자산 해킹 연루 의혹에 대해 일관되게 부인해 왔다. 다만 이번에는 미국 수사당국의 지목이 나오기 무섭게 사실관계를 부인하는 공식 입장이 발표됐다는 점, 그리고 최고 지도부의 직계로 평가받는 인사가 직접 나섰다는 점에서 북한이 이번 사건을 단순한 해외 보도가 아닌 중대한 현안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표현은 상황 전개에 따라 후속 대응 카드가 가능하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북한 지도부의 담화에서 이 같은 문구는 견제 수위를 높이는 전조로 받아지는 경우가 많아, 향후 북미 간 언전(言戰)이 이어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가상자산 거래소 이용 화면 이미지. 사상 최대 해킹을 당한 바이낸스는 피해 보상과 시스템 점검을 병행하고 있다 / 출처: Medium / 라이선스: FREE(CC·퍼블릭도메인 필터 통과)바이낸스, 피해 95% 자체 보전…출금 재개 뒤 자금 이탈
바이낸스는 자체 자금과 비상준비금으로 이용자 피해액의 약 95%를 보전했으며, 중단됐던 출금 서비스를 단계적으로 재개했다. 회사는 고객에게 금전적 손실이 전가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당초 바이낸스는 한 엔지니어의 노트북이 해킹당하면서 승인되지 않은 인출이 이뤄진 것으로 보고했지만, 리처드 텅 공동최고경영자는 후속 조사에서 추가적인 보안 침해 지점이 확인됐다고 밝히며 공격 범위가 처음 파악보다 넓었음을 인정했다. 정확한 공격 경로는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이용자 심리도 흔들렸다. 출금이 재개되자 불과 반나절 만에 전체 운용 자산의 2%에 달하는 약 5조원이 순유출된 것으로 파악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우려하지 않는다"며 "파악하고 있다"는 취지로 말하며 신중한 대응을 이어가고 있다.
해킹 소식 이후 거래소 출금 재개 뒤 이용자 자금 이탈이 관찰됐다 세탁 수법은 '전례 없는' 수준…북한 가상자산 해킹 최대치
체이널리시스는 올해 보고된 전 세계 가상자산 해킹 피해액의 약 89%가 북한 연계 조직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산했다. 국제 제재로 외화 확보가 어려워진 북한이 사이버 자산 탈취를 주요 자금 조달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는 분석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자금 세탁 수법도 이전과 차원이 다른 것으로 평가된다. 해커들은 자동화 프로그램으로 짧은 시간에 수천 건의 거래를 일으키고 자금을 여러 지갑 주소 사이로 반복해서 돌렸다. 추적을 더 어렵게 만들기 위해 이미 거친 주소로 자금을 되돌려 보내는 수법도 썼으며, 동결이 가능한 스테이블코인은 동결이 불가능한 이더리움 계열 자산으로 빠르게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는 향후 사태의 결실을 두고 탈취 자금의 회수와 동결 경쟁이 관건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수사당국과 거래소·발행사의 협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북한 측의 부인과 견제에도 불구하고 수사와 자금 추적은 계속될 전망이다.
사건은 진행형…회수 경쟁과 북미 공방이 향방을 가른다
김여정의 담화는 사상 최대 규모 가상자산 해킹 사건이 단순한 보안 사고를 넘어 국제 수사와 외교적 공방이 맞물린 현안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예의주시' 발언이 상징하듯 상황은 아직 진행형이다. 탈취 자금의 동결과 회수가 어디까지 가능해질지, 그리고 미국의 후속 조치가 나올지에 따라 가상자산 시장의 안정세와 지정학적 긴장 수위가 함께 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